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28 사건 (문단 편집) == 항쟁의 격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imgs-54.fc2.com/20130228124605a9e.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mtholyoke.edu/228_mob.jpg|width=100%]]}}} || 다음 날인 2월 28일 천원시는 결국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은 국민당이 운영하던 경찰서와 군대로 몰려들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중은 경찰서에 난입해 천원시를 죽인 가해자를 포함한 경찰관 2명을 죽이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군중은 행정장관 공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식량이 부족해 쌀값이 폭등하던 당시 행정장관 공서에 막대한 쌀이 비축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의 수가 급증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경비 병력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결국 대만인들은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점차 시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3월 1일 이후 소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도 폭발했는데 이는 결국 상호간의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던 데다 특권 독점에 따른 갈등도 있었고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 지금은 대만에서도 [[표준중국어]]가 쓰이지만 당시 대만에서는 표준중국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본성인들이 썼던 [[대만어]]는 대부분의 중국어 방언들이 그렇듯 이름만 방언이지 외국어 수준이다. 식자층이 썼을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다.]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대만 본성인이 외성인과 국민당에 저항할 때 집단을 구별한 기준은 [[대만어]](민남어)/[[일본어]] 구사 능력이나 [[기미가요]] 제창 가능 여부였는데 대만 본성인들은 저항의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노래를 부를 수 없고 민남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외성인들을 '[[짱꼴라]](チャンコロ)'라고 부르면서 죽였는데 이는 과거 일제 육군에서 중국인들을 지칭하던 표현이였다. 처음부터 외성인이나 국민당에서는 일본 제국에 협력한 매국노라며 대만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였는데 충돌 과정에서 대만인들이 [[일본 제국]] 시대의 경험으로 피아 구분을 하면서 그런 인식이 고착되었다. 결국 두 집단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영화 <비정성시>에 이때의 일화가 나온다. 청각장애인 주인공에게 상대방이 대만어와 일본어로 질문했는데 이를 주인공이 알아듣지 못하자 곧바로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동행인이 사정을 설명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알 수 있는 장면. <비정성시>의 [[허우샤오셴]] 감독이 외성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보아야 한다.] 3월 1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담배단속으로 야기된 유혈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나 행정장관 천이와의 타협으로 다소 중립적인 명칭인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2일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1.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1.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1.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외성인들에 대한 공격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타이베이의 미국 영사관에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국민정부 측에 대만 시민들이 미국의 신탁통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국민당을 격분시켰다. 이후 3월 5일에 처리위원회 8항목 정치개혁안을 제출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1. 대만성 행정장관의 비서장, 민정장, 재정장, 교육장, 경무장은 본성인을 임용한다. 1. 공영사업은 본성인이 경영한다. 1. 현장과 시장은 선거로 뽑는다. 1. 전매제도를 철폐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처리위원회 측은 3월 6일 좀 더 구체화된 32개조 정치개혁안을 제출한 후 장제스 주석 만세를 외치면서 정식성립대회를 마치는 등 급진주의를 자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천이도 3월 6일 밤 방송을 통해 현시정부를 선출제로 구성하겠으며 관료 인사를 본성인 중심으로 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3월 7일에 이전의 32개조에 10개항을 더한 42개조 요구가 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대만인 전범과 한간의 무조건적인 석방, 대만 행정장관 제도 폐지, 처리위원회 내부에 정무국 설치, 대만 주둔 육해공군에 대만인 채용 등 보다 근본적인 요구사항이 들어갔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징병으로 징집된 대만인이 인구의 1%에 달하던 상황에서 일본군 복무 여부만 가지고 한간으로 몰아 처벌/살해하고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던 국민당 정부의 조치가 얼마나 대만인들의 반감을 샀지 알 수 있다. 천이는 2.28 사건 발생과 동시에 장제스에 파병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고 시간을 끌기 위하여 대만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한 수습위원회와 협상에 나선 것이기 때문에 후일 42개조 요구를 두고 국민당 프락치가 강경진압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협상 모션을 취하면서 시간끌기에 성공한 당시 대만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 [[천이(1883)|천이]]는 국부군 증원부대의 대만 도착을 하루 남겨 놓은 3월 7일 제시된 급진적인 요구인 42개조 요구를 당연히 거부하였고 대만 엘리트들로 구성된 처리위원회도 42개조 요구가 성민의 합의가 아니라며 3월 8일 42개조 요구를 번복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3월 8일 지룽에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병력이 도착하였고 이들은 함상에서부터 항구로 소탕사격을 실시하며 바로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